[뇌과학 탐험] 이불 킥, 잠 못 이루는 밤 이제 그만…

브레인 Vol.75

“당신의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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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수면 단계에서는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렘수면(REM; Rapid Eye Movement)'이란 것이 일어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과의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는 곳을 찾아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는 반대로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거꾸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들이 더욱 강하게 떠오르며 오히려 깊어지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멜로 영화 스토리로 접어든다.

▲ 영화 <이터널 선샤인>

비록 영화 속 설정이긴 하지만, 정말로 아픈 기억들을 지울 수 있는 것일까? ‘이불 킥’ 할 만큼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입은 기억들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트라우마 한두 개 정도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현대인들은 다소 광범위하게 보면 대부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적 외상을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을 뜻하는 PTSD의 본래 의미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한 경우 심한 고통을 느끼며 일반적인 스트레스 대응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잊는 기억, 오랫동안 남는 기억

▲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해마(hippocampus)는 실제로 그 모습이 바다생물 해마(sea horse)와 유사해 해마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출처: Wikimedia)

어떤 기억은 금세 잊혀지고,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남는 걸까. 치매(알츠하이머 병) 환자의 경우 최근 기억부터 잃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건 무엇 때문일까.

뇌는 간단히 말하면 뇌 바깥으로부터 정보를 입력받아, 처리해서, 출력하는 이른바 정보처리기관이다. 우리의 뇌는 몸으로부터 오는 감각 자극이나 몸 바깥의 사람과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정보에 노출되는데, 이를 우리의 뇌가 적절하게 처리한다. 놀라운 능력인데 때론 고통스럽다.

우선, 기억과 관련한 뇌 속 대표 부위 하나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억 제조의 장인, 기억의 공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그 특이한 모습 때문에 ‘해마hippocampus’라고 불리는 기관이 그 주인공이다.

뇌과학자들은 해마가 단기 기억을 저장하고 분류한 후 대뇌피질과 연결해서 장기 기억으로 바꾼다고 보고 있다. 기억의 회상과도 관련이 있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도 관여한다. 따라서 이 영역이 제거된 환자는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해마의 역할을 얘기할 때 늘상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 환자가 된 한 남자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 <메멘토Memento>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알려진 헨리 몰래슨(1926~2008)이다.

생전엔 ‘H.M.’이란 이니셜로만 알려진 그는 뇌과학계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는데, 자전거 사고로 뇌를 다쳐 외과 수술을 받던 도중 해마를 다친 것이다. H.M.은 수술 받기 이전의 일들은 기억했지만 그 이후에 경험한 일들은 어제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가끔은 확 잊어버리고 싶은 뇌의 비밀이 해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이다.

수면 중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동작, 뇌 속 기억 재처리 과정

▲ 개그맨 이경규의 개인기인 눈동자 굴리기. 단순히 재미나게 봤던 이 장면이 실제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기법과 유사하다. (출처: KBS <연예대상> 화면 캡처)

재미있는 것은 이 해마의 기억 처리 과정이 대부분 수면 중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에게 수면은 육체적 피로를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식 작용도 한다. 수면으로 소비되는 3분의 1이라는 시간이 나머지 3분의 2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잠이 보약이다’라는 말은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수면 중에는 기억과 밀접한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잠자고 있는 사람의 눈꺼풀 안쪽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면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분명 잠을 자고 있는데, 눈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면 중에서도 깊은 수면 단계인 ‘렘수면(REM; Rapid Eye Movement)’ 상태로 뇌의 혈류량이 많아지며 맥박, 호흡, 혈압, 체온이 상승한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눈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보통 이 수면 단계에서 꿈을 꾸게 된다.
 
몸은 마비된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뇌는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REM 수면은 우리의 기억을 보관, 유지하고 편성하며 필요에 따라 재편성하는 뇌의 정보처리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것은 REM 수면 중 일어나는 좌우 안구 운동이 트라우마 정신과 치료에 활용된다는 점이다.

PTSD 치료에 활용되는 좌우 안구 운동의 놀라움

▲ 양측성 시각 자극을 사용한 공포 기억 반응-감소 효과 (출처: IBS)

유명 개그맨 이경규가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는 재미난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그냥 웃지만, 그 동작은 실제 PTSD를 치료하는 정신과 심리 치료 기법 중 대표적인 ‘안구 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에 해당한다. 말은 어렵지만, 핵심은 눈동자가 해당 초점을 이동시키는 단순한 움직임이다.

재미나게만 보이는 좌우 안구 운동이 트라우마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뇌를 심장, 위, 간처럼 하나의 생물학적 기관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기인한다.

뇌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발달하는 구조이다. 기본적으로 신체의 좌우 움직임에 따른 감각 신호가 뇌에서는 반대쪽 뇌와 상호작용을 한다. 좌우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 역시 좌우뇌 교차를 기본으로 작동한다. 정보처리에서 ‘균형’은 뇌의 핵심 처리 과정이다.

한국 과학계, 경험적 치료법 EMDR 동물실험으로 첫 과학적 원리 입증

PTSD에 사용된다는 EMDR의 경우 자신의 공포 기억을 회상하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는 등 양측성 자극을 동시에 줘 정신적 외상을 효과적으로 치료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정신적 외상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져서 활용되고는 있으나 그 원리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최근 한국 과학계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신희섭 단장 연구팀은 KAIST 정재승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고통스러웠던 상황의 기억으로 인해 공포 반응을 보이는 생쥐에게 좌우로 반복해서 움직이는 빛 자극(양측성 자극)을 주었을 때, 행동이 얼어붙는 공포 반응이 빠르게 감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생쥐에게 제시한 기법은 바로 ‘EMDR(안구 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로 정신과에서 활용하는 심리 치료법의 효과를 동물실험으로 재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포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좌우로 움직이는 빛이나 소리 등이 반복되면 정신적 외상이 효과적으로 치료된다는 사실은 기존에도 보고된 바 있으나 원리를 알 수 없어 도외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트라우마’ 치료가 어려운 것은 사실 그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는 동물에서의 공포 기억 소거 모델에서는 억제됐던 공포 기억이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오래전부터 확인했으며, 최근에는 공포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방법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용된 화학 물질을 사람을 대상으로 바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또한, 치료법의 뇌 과학적 원리를 밝히는 과정에서 공포 기억 조절 뇌 회로를 새로이 발견하는 중요한 성과를 이뤘다. 공포 기억 소거 과정에서 양측성 자극이 상구 뇌 영역을 자극하며, 중앙 내측 시상핵을 거쳐 결과적으로 공포 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의 활동을 억제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해당 연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네이처Nature》 온라인 판에 게재됐다.

신희섭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단 한 번의 트라우마로 발생하지만 약물과 심리 치료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공포 기억 억제 회로를 조절하는 약물이나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에 집중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쉽게 치료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뇌는 마음기제의 총사령탑, 올바른 활용과 계발이 관건

사실 살아오면서 받은 심한 상처, 불면의 밤을 지새울 정도로 힘든 아픈 기억은 실제로는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좋은 기억도 마찬가지로, 아픈 기억도 강렬한 감정적 작용이 덧씌워지면서 뇌의 신경망에 장기 기억화 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트라우마로 발생하기도 하는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약은 현재로선 없다. 치료를 한다고 해도 증상이 흔하게 재발해 치료가 쉽지 않은 정신과 질병이다.

중요한 것은 PTSD는 단 한 번의 트라우마로 발생하기도 하는 반면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감정적 충돌과 상처가 얼마나 뇌에 커다란 부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뇌는 인체에서 정신 활동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생명 활동부터 감정과 기억, 몰입과 상상, 영감과 통찰 등의 총사령탑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보통 ‘뇌’를 자각하지 않고 생활하지만, 우리가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눈을 감는 동작 하나하나는 엄청난 뇌의 처리 과정을 수반한다. ‘좌우 안구 운동’이 단순히 눈동자를 굴리는 하나의 개그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 자체가 뇌와 연결성을 갖는다. 그리고 영향을 미친다.

일반 성인들이 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첫째 뇌를 쭈글쭈글한 두개골로만 인식하는 것, 둘째 무의식적으로 뇌를 하나의 신체 기관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몸과 뇌 사이의 정보 통로를 원활히 하는 것, 즉 움직임은 몸을 좋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뇌 기능을 발달시킨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다. ‘움직임motion’은 동물(動物, 움직이는 것)과 식물(植物, 심겨 있는 것)을 구분 짓는 대표적인 차이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인간의 뇌만큼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존재는 없으며, 태어난 이후 이토록 많은 뇌의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 역시 단연코 없다. 집중과 몰입,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상상, ‘나는 누구인가’로 대표되는 내면 탐색 또한 인간의 고등 정신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이다.

오늘밤 잠들기 전 좌우 안구 운동 해보실까요?

글. 장래혁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뇌교육융합학과 교수, 《브레인》 편집장
cybermir@gw.global.ac.kr

※ 이 글의 원문은 기초과학연구원 공식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초과학연구원 블로그는 최신 IBS 연구성과를 비롯해 기초과학분야의 다양한 지식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공식블로그] blog.naver.com/ibs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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